[제1회 한중 선박여행 글짓기 대회] - 학생부문 대상작품 (신지혜)

할아버지는 꼭 봄 같은 분이셨습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15년 전 그날도 할아버지처럼 따뜻하고 푸근한 날이었습니다. 할아버지의 식어버린 몸과 감은 눈은 기억나지 않습니다. 기억나는 거라곤 창 밖에 떨어지던 배나무 꽃잎이 봄 햇살을 받아 유난히 더 하얗게 빛났다는 것과 누워서 그 꽃잎을 바라보시던 할아버지의 눈동자뿐입니다. 꽃잎을 보며 조용히 운명하신 우리 할아버지에겐 딱 하나, 정말 작은 소원 하나가 있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돌아가시기 며칠 전, 그네를 밀어주시며 나에게 그 소원 얘기를 해주셨습니다. 어쩌면, 그 소원 때문에 돌아가신 할아버지 모습을 기억하지 않으려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안 무십나?”

“하나도 안 무서워! 할아버지두 타. 내가 밀어줄게.”

할아버지는 눈가에 주름이 자글자글해지도록 허허 웃더니 그네에 앉아 무릎에 나를 앉히셨습니다.

“낸중에는 그네말구 배 타러 가자.”

배! 배라면 그림책에서밖에 보지 못했지만, 나는 배 박사입니다. 할아버지는 매일 나 담으루 가장 좋아한다는 바다와 배 이야기를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정말? 약속!”

“그래.”하는 할아버지는 이번에는 온 얼굴이 쭈글쭈글해지도록 웃었습니다. 난 할아버지의 그 웃음이 좋았습니다.

“우리나라는 지금 반띠로 쭉 쪼개지가 있는데 저짜를 북한이라 카고 이짜를 남한이라칸다. 할배 원은 배 띄아가 니캉 북한 거쳐 백두산에를 가따 오는기라. 니 백두산 아나? 백두산 가믄 올 때는 쭝국에서 이짜루 다시 배 타구 돌아 오는기다.”

나는 할아버지가 당췌 무슨 말을 하는 지 하나두 못 알아들었지만 그래두 배 탄다는 말에, “좋아.”하고 히죽 웃었습니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매일 들려주던 바다와 배를 상상해보다가는, 다시 한 번 나는 입이 귀에 걸리도록 웃으며, “탈래!”하고 소리쳤습니다.

할아버지는 대답이 없었습니다. 공원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서 가쁘게 숨만 쉬었습니다.

“탈래, 탈래!”

“할배는 이라쿠롬 하고싶다.”

나는 할아버지가 이야기를 해줄 때 늘 그랬듯이 얼른 눈을 감고는, “응!”했습니다.

“배 탄다 아이가? 그라모 바다가 출렁출렁~함시로 마음을 가따가 울렁울렁~하게 해줄끼라. 그짜서부터 니캉 내캉 바다캉 대화를 시작하는기라.”

이날 내 머릿속에서 그려졌던 영상은 아직도 내 뇌리에 박혀 매년 이 맘 때쯤, 그니까 배꽃이 뚝뚝 떨어질 때쯤이면, 눈을 감고 생각하게 됩니다. 눈을 감고 있으면 컴컴한 쥐색 아스팔트 도로는 할아버지가 말했던 퍼어런 바다가 되고, 바닥에 떨어진 꽃잎은 바다에 반사된 햇빛으로 변합니다. 마음이 울렁거리고 바다와 대화를 시작합니다. 내가 바다를 그 바닥까지 들여 볼 것같이 지그시 쳐다보자면, 바다도 나를 다정하게 바라봅니다. 가끔은 물고기도 같이 놀자고 물 밖으로 뛰쳐나오고, 갈매기도 날아와 어리광을 부립니다.

내 옆에는 꼭 할아버지가 이야기를 해주듯이 바람이 와서 속삭입니다.

나는 아직 한 번도 배를 타 본 적이 없지만, 배는 나의 안식처입니다. 할아버지가 보고 싶을 때, 어딘가에 의지하고 싶을 때 나는 배꽃이 떨어지지 않아도 책상 앞에 앉아 눈을 감고 배를 탑니다. 배가 나의 안식처라면, 승객들은 서로 얼굴도 나이도 이름도 모르지만 모두 나의 가족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가족에 대한 고민을 나누고, 축하할 일에 대한 기쁨을 나누고 아픔에 대한 슬픔을 나누고 정을 나눕니다. 나는 가끔 배나 할아버지뿐만 아니라 그 사람들이 너무나도 그립습니다.

며칠 전에는 공원에서 배를 탔습니다. 눈을 뜨고 바다가 다시 아스팔트가 되었을 때, 앉아있던 배가 벤치로 변해버렸을 때, 나는 집으로 돌아가는 그 길을 걷기가 너무도 싫었습니다. 내 가족들이, 이름도 모르지만 서로의 감정을 나누던 바다같이 넓고 푸르던 나의 사람들이, 서로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는 아스팔트같이 차갑고 딱딱한 사람들로 변해버렸기 때문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왜 우리 할아버지가 그토록 배를 사랑했는 지 알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나도, 할아버지의 꿈을 같이 꾸게 되었습니다.

할아버지 배를 타면 단 한 가지, 아직도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 장면이 있는데 바로 바다 위에서 본 북한의 모습입니다. 나는 배를 타게 된다면, 반드시 첫 번째 여행을 그 장면 속의 풍경으로 다녀오고 싶습니다. 그리고 우리 할아버지한테, 나는 할아버지가 약속도 안 지키고 가서 밉지만, 그래도 내가 할아버지 대신 소원을 이루어 주었노라고, 돌아오는 중국 선박 위에서 소리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