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에고 가는 길에서의 어떤 십자가

                                                           하노이 한국학교 11학년 이 정 현

우리 가족은 이번 여름방학 때 산티에고 순례길(Santiago de camino)을 걸어보기로 했다. 엄마는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고, 등산을 좋아하시는 아빠 또한 순례길에 흔쾌히 동의하셨다.

< 생장에서. 초반의 나. 오른쪽에서 두 번째.>

설명에 따르면 20일 동안 약 600km를 걷는다고 들었지만 600km라는 수가 뭘 의미하는지 실감 할 수 없었다. 그냥 먼 길을 걷는다와 동의어였고 걷기 싫어하는 나는 온갖 핑계를 대어 가족여행에서 빠지려고 했다.

안 그래도 최근에 잔뜩 살이 쪄 뚱뚱해진 내가, 그런 말을 할 때마다 엄마는 설득에 설득을 하다가 결국엔, 한심하다는 눈으로 쳐다보았는데 그럴수록 엄마와 나 사이는 보이지 않는 벽이 생기기 시작했다.

< 꽤 고산지대에 위치한 폰세바돈. 일반적인 순례자 대기줄이다. >

어쨌든 아빠는 무지 많이 걸어야 하므로 연습이 필요하다고 하시며 식구 모두를 데리고 아파트 앞 큰 체육관이 있는 한적한 거리를 저녁마다 돌기 시작하였다. 한 바퀴에 약 1.5km정도인데 부모님은 6~8바퀴를 도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힘이 들어서 슬쩍 빠져나와 들어가거나 뒤에 처져 쉬었다가 슬그머니 합류하였다.

< 폰프리아에서 출발하는 고산지대 분지의 자욱한 안개, 그리고 동생. >

나중에는 그렇게 꾀부리는 나를 부모님은 아시면서 모른 척 하시는 것 같았고 그만큼 나는 가족으로부터 멀어져갔다. 나는 스스로 마음의 벽을 높여 갔고 무관심해진 부모님을 속으로 원망하며 몸도 마음도 둔해져 마침내 공부에도 흥미를 잃어버렸다. 쾌활한 아빠도 집에 들어오시면 무슨 일로 자주 엄마와 다투시곤 했지만 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빠는 내게 "내가 널 도와줄 일이 하나도 없구나."하셨고 난 들은 체 만 체 했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마침내 7월17일(일), 우린 추적추적 비오는 밤 11시 비행기로 하노이 공항을 출발했다. 이것이 내 터닝 포인트의 시작인 줄은 그때 당시에는 몰랐었다.

< 순례증서 들고 한 컷! 직접 걸어서 받아보지 않으면 이 기쁨을 모른다. >

여섯 시간의 비행 후, 폴란드 바르샤바공항에 도착해 1시간 후 파리로 출발, 다음 날 몽빠르나스 역에서 TGV(기차회사명)를 타고 생장으로 향했다. 드디어 7월 20일(수) 오후2시 경에 우리의 까미노 출발점인 생장에 도착했고 날씨는 맑았지만 앞으로 걸어야 할 일을 생각하니 마음은 무거웠다.

생장은 동화에서나 나올 만한 집들이 창문마다, 베란다마다 다채로운 꽃을 키우고 있으며, 꽃을 닮은 할머니들이 집앞에서 부엔까미노(좋은 길이 되길!)해주셨다.

< 산티아고 대성당. 고딕 형식의 건축물이다. 아름답다. >

여기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알베르게(순례자들의 숙소)를 정하는 일이고 크리덴시알 카드(순례자카드)를 발급받는 것이다. 이것을 발급받을 때는 여권도 보여줘야 하고 여행 내내 잊어버리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 크리덴시알 카드에 시골예배당(또는 알베르게, 바 등등)에서 찍어주는 도장을 받아야 하며 이 도장이 찍힌 크리덴시알 카드가 있어야 마지막 산티에고에 도착해서 순례자 인증서를 발급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크리덴시알 카드를 발급받을 때, <알베르게 위치표:알베르게가 있는 장소와 그 사이의 거리가 표시된 표>와 <등고선표:길의 오르막,내리막 거리가 표시된 표> 두 가지를 같이 주는데 비닐에 꼭 싸서 배낭 손닿는 곳에 두면 길을 걸을 때나, 다음 날 계획을 잡는데 많은 참고가 된다.

이 모든 것을 잘 준비한 후에 다음 날 7월21일 새벽 6시20분경 우리 가족은 주황색 우의를 입고 드디어 피레네 산맥을 향해 출발했다. 새벽의 어둠은 가시지 않는 듯 했고 어둠은 우리 위로 비를 뿌리며 고난의 길에 오른 우리를 축복하는 듯 했다. 새벽부터 부슬부슬 비가 오고 몹시 추웠기 때문에 꼭 우의가 꼭 필요했다.

그 날 우리가 넘은 피레네 산맥의 길은 해발 1400m, 걸어야 할 거리 수는 론세스바예스까지 27km이다. 프랑스와 스페인의 국경을 넘어가는 의미있는 길이다. 어두운 새벽, 그림으로만 보던 노랑색 화살표를 라이트펜에 의지해 어슴푸레하게 봤을 때의 느낌은 묘했다.

모르는 누군가의 인도를 받아 길을 걷는 이 즐거움의 정체를 잘 알 수가 없었다. 어쨌든 노랑색 화살표를 따라 열심히 올라가기 시작했지만 계속되는 오르막을 오르기에 내 체력은 역부족이었다. 산행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오르막은 급경사를 이루기 시작했고 체력이 좋지 않고 오르막에 약한 내 몸은 균형을 자주 잃고 발을 헛디뎠다.

아빠는 물을 자주 마시지 말고 호흡을 길게 하라고 곁에서 계속 조언해주시고 격려해 주셨지만 시야가 아찔하고 머리가 멍해 들리지 않았다. 내 몸은 간절히 물을 원했고 물은 마시면 마실 수록 그 만큼의 갈증을 불렀으며, 오르면 오를수록 왜 부모님이 이런 곳에 나를 데려 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정상에 다가갈수록 나는 뒤로 처지기 시작해서 동생마저도 앞질러 가자 자포자기하는 심정이 되어 가족들과의 거리는 점점 아득해져 갔다.

마침내 갈증과 허기에 지친 나는 1400m, 내 눈앞에서 안개가 지나가는 정상에서 드러누워 버렸다. 자꾸 눈이 감기고 아득한 느낌이 들었다. 등산경험이 많으신 아빠는 침착하게 자신의 우의를 벗어 깔고는 나를 눕혔다. 그리고 배낭안의 쵸콜렛, 간식거리와 물을 주시고는 쉬게 해 주셨다. 다리를 배낭 위에 얹고 가만히 누워있으니 바람이 귓가를 스쳤고 서서히 정신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어쨌든 부모님의 도움으로 다시 계속되는 내리막길을 필사적으로 내려와 론세스바예스 알베르게에 도착하니 아무 것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저 기계적으로 씻고, 먹고, 잠이 들었다. 그렇게 힘든 나의 까미노 첫날이 끝이 난 것이다.

다음날은 론세스바예스에서 주비리로 가는 약21.5km 구간이었는데 아침부터 엄마의 잔소리에 화가 난 나는 뒤에 처져서 또 힘겹게 걸었다. 밀밭이 지나갔는지, 들꽃이 얼마나 예뻤는지, 돌담길에 비친 내 그림자가 나를 계속 격려한 것도 모르고 물만 마셨다.

그래도 어제 보다 나은 것은 그늘이 좀 있었다는 것이고 내리막이 많아서 한결 나았지만 21.5km는 영원히 끝이 날 것 같지 않았다. 어느덧, 쭉쭉 뻗은 전나무 숲을 지나니 멀리 마을이 보였고 그곳은 주비리였다.

주비리 이후, 내 몸은 서서히 조금씩 길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셋째 날, 넷째 날까지는 계속 발바닥에 물집이 생겨 알베르게에서 쉴 때마다 발바닥만 쳐다봤다.

하지만 다섯째 날 레이나에서 에스텔라 22.5km 구간을 시작할 때, 내 몸은 알 수 없는 기운으로 가득 차올랐다. 이른 새벽 여섯시 이십분. 아침에 일어나 라이트펜을 켜고 어두운 레이나의 골목길을 벗어나는데 달각 달각 스틱이 돌바닥에 닿는 그 소리가 경쾌하게 들렸다.

일어나자마자 침낭을 좀 빨리 정리하라는 아빠의 잔소리도 기분 나쁘지 않았고 밥 좀 그만 먹으라는 엄마의 잔소리에 자존심도 상하지 않았다. 달각- 달각하는 소리에 집중하며 발걸음을 리듬에 맞춰 걸었다. 길고 긴 길.... 숨막히지만 탁 트인 대륙의 풍경이었다. 산으로 뒤덮인 한국과는 또 다른 시원함...

콧등에 송글송글 맺힌 땀을 닦으며 걸으니 이윽고 완만한 오르막을 올라 시라우키 마을 초입에 있는 바에서 순례자들이 모여 앉아 쉬고 있기에 동생과 나는 거기서 부모님을 기다렸다. 5분여가 지난 후, 엄마는 왼다리, 아빠는 오른다리를 각각 절고 계셨다. 걱정은 되었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빵과 간식을 먹고 휴식을 취한 다음 다시 걸었다.

나는 내가 들고 있는 스틱을 아빠에게 드렸더니 아빠는 괜찮다고 했지만 거짓말인 것을 난 알고 있었다. 결국 오늘 우리의 도착시간은 부모님의 난조로 어제보다 약간 늦은 오후 두시가 되었고 아빠는 도착하자마자 침대에 누워버렸다. 엄마는 매일이 그렇듯이 왼쪽 다리를 절룩거리며 슈퍼마켓을 찾아 낮선 거리를 헤매었고 나는 따라다니며 아빠 대신 짐꾼이 되었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이와 비슷한 상황이 계속되었고 어느새 여행은 팔일 째를 맞고 있었다. 팔일 째 7월28일 로그로뇨에서 나헤라로 가는 구간인데 이 구간은 거의 30km육박하는 긴 길이었다. 어제만 해도 27km나 걸었는데 웬일인지 부모님이 갑자기 서두르신다. 이유는 간단하였다.

우리의 일정은 20일 밖에 없었고 목표로 한 길은 600km인데 매일 23km미만으로 걸으니 초조했던 것이었다. 특히 엄마의 성취욕구는 남달라서 1km라도 더 걸으려 아빠를 설득하고 계셨다. 그리고 아빠는 자신의 오른쪽 다리 보다는 엄마의 무릎을 걱정하여 구간을 짧게 하자고 하셨지만 엄마가 이겼던 것이었다. 늘 그러하듯이~

전날보다 더 이른 깜깜한 새벽에 서둘러 출발했다. 우리는 미약한 라이트펜의 빛에 의지해 노랑화살표를 따라 서서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우리는 로그로뇨 시가지를 약간 벗어나 한적한 숲속으로 들어갔을 때였다. 전지가 많이 닳은 작은 라이트펜이 갑자기 꺼져버렸다.

숲속인데다가 아직은 깜깜하여 옆 사람 얼굴도 안 보이는 상황에서 다들 당황하고 있는데, 갑자기 동생이 "야! 하늘 봐!"하고 외쳤다. 모두들 하늘을 올려다보니 거대한 은하수가 거대한 원을 그리며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아! 이 길은 별이 흐르는 길이었던 것이었다. 놀라운 광경이었다.

이윽고 서서히 동이 터 오고 구름 아래 부분이 주황색으로 폭 젖어들 무렵, 우리는 무사히 숲 속을 빠져나와 큰 도로를 아래쪽으로 내려다보며 걸었다. 도로 갓길을 따라 오랜 시간 걷는 것은 정말 지루하다.

길 양옆으로 포도농장은 여전히 계속되었고 바닥 또한 끝없는 자갈길이지만 경사가 비교적 완만하여 걷기에 좋았으므로 난 선두에 섰다. 우리의 그림자가 선명해질 무렵 로그로뇨 영역을 주욱 벗어나 나바레떼 못 미쳐 2차선 도로 옆길 오르막과 내리막을 지나칠 때 였다.

자동차길 옆 철조망에 끝없이 걸린 십자가를 보았다.

앙상하고 작은 나뭇가지들을 십자로 엮어서 철조망에 걸어둔 아주 단순한 것들이었다. 어떤 것은 갈대로 만들어진 허약한 것도 있고, 철사로 만들어진 것도 있고 모양도 크기도 제각각이었다. 그러한 십자가의 행렬이 오르막에서 내리막으로 끝없이 계속되었다.

처음에는 허접해 보여 흘깃 보았으나 오래 되어 거멓게 변한 자투리 나무십자가, 헝겊으로 뭘 싸서 만들었는데 헝겊이 너덜너덜 바람에 날리는 것을 보며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뭔가 말을 하고 있다는 느낌도 들었다. 그냥 철조망에 걸려 있을 뿐인데......

먼저 이걸 최초로 만들어서 철조망에 걸 생각을 한 사람은 누굴까, 그 사람은 이렇게 많은 십자가가 생길 줄 알았을까? 그 다음 사람은 어떤 소망을 빌었을까, 또 그 다음 사람은....?

고개를 들어 보니 저 건너편 언덕 위에서 검은 스페인 황소가 아주 기품있게 내려다보며 내게 ‘자신있게 나아가라!, 걱정하지 마라!라고 속삭이는 것 같다. 나는 이제까지 나의 십자가를 지지 않으려고, 회피하려고 했던 것임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내가 스스로 나아가지 않았음을 알았다. 사람마다 저마다의 십자가가 따로 있었음을 왜 몰랐을까? 나만 어려운 게 아니었구나. 속으로, 그러면 나는 이제까지 뭘 하려 했던 것일까? 이런 생각을 하며 멍하니 서 있는데, 어느덧, 아빠는 내 가까이 와서 가자라고 하셨다. 나는 조용히 내가 가진 스틱을 다리가 아픈 아빠께 드리고 말없이 함께 걸었다. 나는 내가 방금 생각해낸 것을 말하지 않았다.

마지막 날 8월 11일 이십이 일째 되는 날이다. 몬테 도 고조에서 산티에고까지 5km남짓 걸으면 모든 산티에고 데 까미노는 종료된다. 뭔가 알 수 없는 섭섭함이 밀려온다. 끝이 보일 것 같지 않았던 그 지긋지긋했던 600km를 다 걸었는데도 여전히 내 마음은 까미노를 걷고 있다, 지금도.

마침내 도착한 산티에고 대성당, 작은 터널을 지나자 믿을 수 없을 거대한 고딕양식의 성당이 그 자태를 드러낸다. 먼저 해야 할 일은 대성당 오른쪽 골목에 있는 산티아고 순례사무실에서 순례자 인증서를 받는 것이다. 먼저 온 사람들이 줄을 길게 서 있다.

길을 걸으면서 만난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해야 할 많은 이야기들이 있지만, 그 이야기는 나와 같이 20일간을 함께한 나의 가족들만이 진실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고 어쩌면 가슴에 새겨져 가족에게도 이야기 할 수 없는 것들이 더 많은지 모르겠다.

불평과 게으름으로 하루하루 보내던 나에게 이런 깨달음의 기회를 준 나의 부모님이 자랑스럽고, 새벽이면 별이 가득한 산티에고 가는 길은 내가 힘들 때 마다 나의 노랑화살표가 되어 줄 것임을 믿는다.

부엔 까미노!